본문 바로가기
독서일지/철학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서양철학사]

by 어린 아이 2021. 6. 9.
728x90
반응형


서양철학사1

군나르 시르베크

이학사

1판 5쇄 2020년 7월 20일

 

184p - 207p (24p)

독서마라톤: 1,753/42,195 (4.15%)


-잡담(서론)

 

고대 아테네 철학자 3인방을 지나 대제국 시기로 접어들었다.

인간은 환경에 영향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20만 명 남짓의 도시국가 폴리스에서 가능했던 철학들이

비대해진 알렉산드로스 제국에선 적용이 불가능해졌다.

당시에 TV나 라디오도 없었으니

사회 안정을 위해 모두를 연결시킬 철학이 필요했다.

 

위 사진은 구글 맵에 헬레니즘 제국 크기를 대충 그림판으로 구분지었다.

횡으로 넓게 분포했고 크기는 현재 중국 크기와 맞 먹거나 내외였던 듯하다.

도시국가는 사진 속 그리스보다도 작은 "아테네" 크기다.

서울 인구수가 958만 명으로 집계되니

20만 명이면 경주나 목포 인구수와 비슷하다.

도시국가라는 단어 중 "도시"가 더 핵심적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테네 철학이 무용지물이 됐음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Q)에프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유사점은 '국가'라는 거인 앞에 선 개인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갈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인간 앞을 지나가는 개미와도 같다. 

현대인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도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에 비해 인간의 능력과 의지가 너무나도 초라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는 언제든 한 개인을 짓이겨버릴 수 있다. 

따라서 두 학파는 "수동적인 자세"라는 공통점도 있다. 

개미는 이런 불안함 속에서 어떻게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

 

 

그 답에서 두 학파의 차이가 드러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다. 

인간을 피해 도망다니는 개미와 닮았다. 

최대한 인간의 눈에 띄지 않고, 자기가 즐길 수 있는 쾌락을 탐미한다. 

여기서 극단적인 쾌락주의는 육체적 쾌락, 물질적 쾌락과 같은 1차원적인 욕구에 의존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는 이보다 정제된 욕구에 의존한다. 

1차원적인 욕구는 물질과 육체가 풍부한 여왕개미나 누릴 수 있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일개미에겐 1차원적인 욕구를 얻는 그 과정 자체가 고통이다. 

여왕개미는 일개미들이 가져다 주는 물질을 마음 껏 즐기고 육체를 취할 수 있지만, 

일개미는 모든 물질과 육체를 스스로 구해야 한다. 

따라서 순수한 쾌락주의는 민중에게 자살을 권하기도 한다. 

물질을 구하기 위해 세상밖에 나갔다 인간에게 붙잡혀 다리 한쪽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최대한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고 우정이나 학문적 탐구와 같은 장기적인 쾌락을 조언한다.

미래와 현재의 수지타산을 면밀히 따진 일종의 계산된 쾌락주의인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은둔과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유사하다. 

하지만, 회피가 아닌 인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명확하다. 

우리가 가진 부와 계급은 바꿀 수 없다. 

(당시 고대 사람들 기준)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기에 피하거나 개입할 수도 없다. 

인간은 여전히 사회나 우주로부터 무기력하다. 

하지만, 이 현실에서 도망가는 것이 아닌 주어진 의무와 역할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를 수련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이 찾아 온다. 

현실이 너무 암담해도 자신의 품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 하다보면 현실에 맞서 행복이란 변화가 찾아온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대표적인 스토아철학자로 전쟁터에서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다 잡았다. 

황제로써의 의무와 역할을 다하기 위해 내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단순히 쾌락을 즐기기 위한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공에 헌신하고 자신의 책무를 다할 수 있을지 고뇌한 흔적이 보이는 일기로 유명하다. 

이렇듯 사회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인내를 강조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며 영향력을 뻗어나갈 수 있었다.

 


-잡담(마무리)


거대한 사회 속에 무기력한 현 세대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도 크게 두 가지다. 
질서에 도망치느냐 인내하느냐.
질서를 거부하느냐 순응하느냐.
위 관점으로 볼 때는 스토아학파가 더 주체적이고
아래 관점으로 볼 때는 에피쿠로스학파가 더 주체적이다.
둘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아마 두 관점 모두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 순응하면서 계급을 바꾸고 싶어 하니까.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