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1
군나르 시르베크
이학사
1판 5쇄 2020년 7월 20일
296p - 325p (30p)
독서마라톤: 1,871/ 42,195 (4.43%)
-잡담(서론)
토마스 아퀴나스가 토대를 너무 잘 잡은 탓일까?
고중세가 되면서 교황의 권한이 절정에 달한다.
마르틴 루터가 시발점이된 종교개혁이 1517년에 발생하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전조 현상처럼
마르실리우스, 오컴의 윌리엄, 마르틴 루터 등이
아퀴나스의 개념 실재론에 대항하여 유명론을 주장한다.
개념 실재론은 보편적인 개념이 대상, 사물들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유명론은 개념이란 것은 단순히 인간 의식에 있는 것일 뿐 실재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 관련 내용에 무지한 사람들이 보기엔 이걸로 왜 그렇게 싸우나 싶지만,
책을 읽어보니 신에 대한 입장 차이가 직결되는 내용이었다.
Q)"보편자 문제"에 관한 상이한 입장들을 설명하라. 특히 아퀴나스와 루터의 입장을 설명하라.
먼저 보편자 문제는
보편자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형식을 갖는가?
에 관한 서로 다른 입장들 간의 논쟁이다.
보편자는 우리가 애플 스마트폰, 갤럭시 스마트폰, LG 스마트폰을 보면서
"스마트폰"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개념들을 의미한다.
수학 공식처럼 우리가 글로 적을 수 있지만,
이게 실재로 존재하는 개념인지 단순히 우리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인지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한 입장은 중세 중기 이후를 기준으로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개념 실재론과 유명론이다.
개념 실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졌던 생각이다.
보편자가 사물 안에 속성 형태로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학 공식처럼 추상을 통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다.
이 경우 인류가 종말한다 해도 그 사물이 존재한다면 이 개념은 존재한다.
반면, 유명론은 그러한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지어낸 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할 뿐이다.
이 경우 인류가 종말한다면 당연히 그 개념은 사라진다.
일반인들 입장에선 이딴게 뭐가 중요한가 싶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면 꽤나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문제가 된다.
기독교 실재론자 같은 경우 이성의 도움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실재론자에게 보편자는 일종의 "신"의 영역같은 것이기에
인간이 추상을 통해 개념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의 섭리,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적 유명론의 경우 이성을 통해 신의 원리에 접근할 수 없다.
이성과 신앙은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다.
오직 성경과 계시를 통해서만 신에게 닿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오직 성경 이라는 교리를 주장한다.
이 둘의 입장에 따라 교황의 입지가 달라진다.
실재론을 기반할 경우 이성을 통해 신의 섭리에 다가갈 수 있으니 교황, 교부의 해석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들에게 특권이 부여될 수 있다.
반면 유명론의 경우 오직 성경만 보고 자신이 깨달아가는 것만 옳다고 주장하니
교황이나 교부, 교회법, 기타 교회의 자율성등을 모두 부정한다.
따라서 유명론을 따를 경우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면죄부 판매에 큰 타격을 입으며
교회의 위상 또한 떨어진다.
Q) 루터의 유명론과 주의주의를 논하라( 원한다면 아퀴나스와 비교해서 논하라)
루터의 유명론은 위에서 보편자 논쟁과 함께 서술 했으니 넘기겠다.
주의주의는 주지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인데 이성과 의지 중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이념이다.
아퀴나스는 주지주의를 믿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의주의를 믿었다.
루터가 말하는 주의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르게 인간의 의지를 뜻한다기 보다 신의 의지를 뜻하는 듯하다.
기독교에서 신은 인격신이기 때문에 이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신이 세상과 우주의 섭리를 창조할 때 의지를 가지고 만들었다.
우리가 레고로 집을 만들 때 우리가 만들고 싶어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선이란 개념도 신이 만든 것이다.
세계의 질서와 선이 옳고 선다울 수 있는 이유는 신이 완벽히 합리적인 존재라서가 아니라
단지 신이 그러라고 의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레고로 자동차를 지어놓고 그걸 집이라 부르면 집이 되듯이
신이 현재의 악이 선이라고 정했으면 그게 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세계의 질서나 선의 개념은 신의 의도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의지가 이성보다 중요하며, 마르틴 루터는 주의주의를 믿었다.
이는 신의 전지전능함을 옹호하기 위해 펼친 논리 같다.
-잡담(마무리)
실재론과 유명론 책을 읽기 전까지 보편자 논쟁은 정말 쓰잘데기 없는 거 가지고 열 올린다 싶었다.
근데 책을 읽고 실재론과 유명론에서 뻗어나가는 신에게 다가가는 방법,
교황과 교회의 권력을 보고 있자니 참 놀랍다.
이래서 철학과 역사가 재밌다.
읽다보면 내가 상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배후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코
난이 검은 조직을 맞닥뜨릴 때 느낌이랑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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