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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영화 후기

<블랙미러 3 - 샌 주니페로>, 미래에 레즈로 사랑한다면

by 보라고둥 2020.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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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미러를 시즌 1부터 본 사람들에겐 무난한 반전, 이성애자라 개인적으로 심심한 느낌 ★★

대체적으로 레즈비언인 사람들에겐 영상미와 분위기가 아주 돋보이는 영화라는 평이 많아 그런 영화를 찾는 분께 추천!


[서론]

  내가 넷플릭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블랙미러 시리즈 중 한 편이다. 블랙미러 시즌 1, 2를 본 사람들에겐 샌 주니페로에서 나오는 반전은 영화 중반부터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에 반전에 의한 쾌감은 전작들에 비해 적었던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여행과 같이 자유에 대한 생각들을 유발한다.

 우리에게 종교적으로 너무나 친숙한 천국이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이 됐다. 블랙미러에서 소개하는 기술들을 보면 정말 인간은 조물주가 되고싶은건가 싶기도하고 내가 죽기전에 인간이 조물주가 되는 날이 오겠구나 싶다.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절대자로 여기는 만화나 영화가 완전히 허무맹랑한건 아니였구나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행복의 역설 :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면 행복할까?

 삶을 살아가면서 '로또 1등이 되면 뭐 할거야?'와 같은 '만약에'게임을 자주하곤 한다. 우리가 지금은 가지지 못하는 것들 '만약에 ~게 된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만약에'가 실현 된 곳이 바로 '천국'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유토피아적인 가상세계다.)모든게 풍족하고 하고싶은대로 다 할 수 있으면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는데, 이런 곳에서도 지금까지 자살률은 85%에 이른다. 어떤 과거에 한정되어 머무르는 것이 지루해져 삶을 버릴 수 있지만 85%는 생각보다 너무 높다. 이 영화에서 시사하는 점은 '모든 것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의 의미는 없어진다는 것이다'이다.

 모든 게 무한하고 모든 게 풍족하다면 우리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배가 안고프니 일을 해서 돈을 벌 필요가 없다. 그리고 모든 상품들은 가치가 없다. 내가 열심히 그림을 그려도 돈을 받을 수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다. 있어도 쓸모가 없다. 내가 열심히 운동할 필요가 없다. 젊음과 건강은 무한하니까. 어떤 경험을 애써 가질 필요도 없다. 시간도 무한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바랐던 경험들을 한 두번 겪은 뒤엔 흥미가 떨어진다. 고통도 조절할 수 있다. 느끼고 싶을 때 느낄 수 있는 고통, 모든 것은 재생된다. 아까운 것도 아쉬운 것도 없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없어진다. 모든 재화가 무한하다면 우리는 애써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유튜브를 찍어 올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게임을 하길 좋아하고, 유튜브를 보길 좋아하지 그것들을 만드는 노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기술 발전은 멈춘다. 굳이 고통을 인내할 필요가 없다. 고통이 필요하다면 그 마저도 조절하여 원하는대로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단순 쾌락을 찾는다. 섹스와 알코올같은 것들에 빠진다. 섹스나 알코올도 하루 이틀이지 10년 20년 계속 그것만 한다고 생각을 하면 지루하고 지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고 치자. 처음엔 즐겁겠지만 그게 10년, 20년 그리고 100년, 500년이 된다면, 이제는 새로운 음식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지 않겠는가? 그리고 멈춰 서서 의미를 찾을 것이다. 단지 내가 먹기 위해 살 필요가 있을까? 과연 이게 삶일까? 그리고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맛을 경험 할 수 있다. 경험 마저도 흔해지고 무가치해 진다. 내가 경험 할 수 있는 것들은 남들 모두 경험 할 수 있다. 이것에 의미가 있을까? 즉, 내가 느끼는 가치가 무뎌지고 남과 비교해서 느끼는 가치가 무뎌지는 순간에 그들은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하는 행동이 차별되는 의미를 생산해 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소중함 : 유한할 때 느끼는 특별함

 모든 것들이 의미없어지는 순간에도 딱 하나 영화속에서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부의 추월차선>이란 책에서 기본적인 것이 충족된다는 전제하에 가장 큰 행복은 가족 혹은 친구나 연인과의 유대감이라고 한다. 결국에 우리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타인과의 유대감이다. 영화속 웨스가 캘리에게 '우리에게 무언가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도 유대감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아마 자살하지 않는 15%는 접속한지 얼마 안된 사람이거나 이런 유대감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닐까?

 캘리는 '천국'으로 가길 망설였다. 딸을 떠나보내고 자신만 '천국'에 간다는 죄책감과 이러한 점을 꼬집고 죽은 남편의 말때문이다. 이러한 죄책감은 캘리에게 벽을 만들었다. 또 다른 이에게 다른 상처를 받지 않고 싶은 걸수도 있고 혹은 자신에게 주는 벌일 수도 있다. 그녀는 방황했다. 자신이 외딴 섬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남들과의 유대감이란 다리를 찾아 헤맸다. 낯선이와의 하룻 밤은 무너져가는 임시 다리일 뿐이었다. 그 낯선이도 무한한 재화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얼굴과 목소리만 다를 뿐 결국엔 수 많은 이성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캘리는 요키를 만나면서 안정적인 다리를 놓았다. 결국 그녀는 천국에 가기로 선택했다. 요키라는 인물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요키는 딱 하나다. 캘리에게 유일하게 가치를 지니는 존재가 되었다. 무한한 진흙탕 속에서 눈에 띄는 연꽃하나이다. 요키와 함께하는 술 한잔은 특별하다. 그녀와 해변가를 거니는 것은 특별하다. 나 혼자 해변가를 거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요키는 불완전하다. 언제든지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 있고, 그녀가 동의 하지 않는다면 같이 해변가를 거닐 수 없다. 결국 요키가 무한한 모든 것을 유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한함이 특별함을 만들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한 물질과 시간이 아니다.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매 순간 유한한 물질과 시간 때문에 정작 필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 항상 '돈이 부족해', '시간이 부족해'라면서 말이다. 물질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한 기본적인 장치일 뿐이다.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본질이 아닌 엄한 곳에 눈길이 간다. 어떤 물질이나 시간이 충족되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떤 것이 충족되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어떤 것이 충족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주는 메세지는 물질과 시간은 행복이 아니며, 행복은 유대감에서 온다는 것이고 행복의 본질은 의미부여이며, 유한함이 그러한 의미를 준다는 것이다.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영원히 살고 싶어요?

뭐라도 느껴보려 갖은 애를 쓰고?" - 캘리


-운명을 가장한 편견 : 캘리가 웨스가 아닌 요키를 선택한 이유는?

 캘리와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웨스도 있다. 하지만 그는 캘리에게 선택받지 못했다. 캘리에게 "난 그날 밤 뭔가 느꼈어."라고 운명적인 메세지를 던지지만 캘리는 단순한 하룻밤 불장난일 뿐이라며 잊으라고 한다. 웨스도 캘리와 같이 방황하는 존재였고 유대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캘리는 웨스를 선택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이 일하는 술집에 들어온 낯선 남자에게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를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그녀가 반하는 순간 그 남자의 외모나 분위기 그리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교양곡까지 의미를 부여한다. 이 교양곡이 우리가 사실 언젠가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의미말이다. 그녀는 야만적이고 지루한 주변 일상에 싫증을 느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유일한 탈출구로 여겼다. 그런데 지적이게 보인 그 남자는 그녀에게 비상탈출구 그 자체였고 아무 의미 없던 모든 요소들은 그 순간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 요소들로 바뀌었다. 우리도 종종 사랑에 빠지면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현재 시각이 4시 44분이래. 그가 나를 생각하고 있을거야'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캘리도 이런 요소가 충분히 있다. 캘리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랑한다. 그러나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 최근에 알았다. 그 동안 겪어보지 못했고 억눌려 있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49년간 본 남편에게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딸이 죽어 '천국'에 갈 수 없는데, 우리끼리만 갈 수 있냐며 말이다. 남편도 남성이다. 남편 덕분에 49년간 남성과의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은 깨졌고, 미움과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킨다.

 반면 요키는 모든 것이 처음인 처녀였다. 처녀는 세계전체를 아우르는 문화적 개념이다. 적어도 미국과 우리나라에선 순결, 깨끗함, 순진함과 같은 맑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영화속에서도 순진하고 다른 인물들과 달리 때묻지 않게 묘사된다. 캘리의 마음 한켠 무거운 감정들을 요키라면 씻어내 줄 수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 아니면 캘리는 자신의 마음을 씻어줄 누군가를 바라고 있지 않았을까? 캘리의 인생에서 남편은 자신을 미워하는 대상이었지만, 딸은 미안함과 아쉬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결국 남성인 웨스 보다 여성인 요키에게 운명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캘리는 그렇게 요키와 인생의 끝자락인 영생을 함께하기로 선택했다.

 나도 캘리와 같이 우울한 현실을 밝게 만들어 줄 누군가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완벽한 사람을 기다리다 괜찮은 인연들을 떠나보내고 있을지도.


(참고) 영화 제목 San junifero는 스페인어이며 뜻은 노간주나무이다. San은 영어로 Saint 성자, junifero는 영어로 juniper이다. 이 나무는 성경에 나오는 나무인데, 내가 무교인이라 자세한 글귀의 해석은 모르겠다. 예레미야 48장 6절에 이 나무가 등장한다. 『4 모압이 멸망을 당하여 그 어린이들의 부르짖음이 들리는도다 5그들이 루힛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울고 호로나임 내리막길에서 파멸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듣는도다 6 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여 광야의 노간주나무같이 될지어다 7네가 네 재능과 부를 의지하지만 너도 정복당할 것이며 너의 신 그모스도 그 제사장들과 대신들과 함게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여기서 노간주나무는 비참과 버려짐, 저주 받는 존재로 그려진다고 한다. 영화속에서 샌 주니페로는 파티 타운이다. 그 다음 캘리가 이동한 곳이 퀘그마이어인데 한글로 "수렁" 혹은 "진창"이라는 의미다. 

 결국 모든 곳이 풍족한 곳도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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