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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 - 이부영 독서일지 2

by 어린 아이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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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판 분석심리학 C.G. 융의 인간심성론
제 3판 12쇄 펴낸날 2022년 3월 25일
지은이: 이부영
출판사: (주) 일조각

(4)대학시절 (24p-27p)
융은 진로문제를 고민했다. 자연과학을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한 미련과 고고학에 대한 관심도 컸다. 외국에서 공부해야하는 고고학은 집이 가난해 포기하고, 자연과학 공부로 시작되고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는 의학을 선택한다. 이건 분명 평범한 타협이었으나 융의 마음속에서는 제 1호와 제 2호가 항상 서로 대항하고 있었고 무의식 또한 무시 못할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제 1호는 융의 당시의 의식적 자아의 일부였고, 제2호는 이를 남김없이 보상하는 내적 인격이었는데 융은 그것이 중세의 유산, 괴테가 가장 강력하게 인용하는 파우스트 속에 인격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무렵 융이 경험한 매우 인상적인 꿈이 있었는데 융이 끝까지 지켜야한다고 믿었던 등불을 의식의 빛으로 보았고, 그림자는 내면의 투철한 생명력이었다. "나는 제1호로서 대학의 학업 속으로, 돈을 버는 일에, 의존, 착종, 혼란, 실수, 굴복과 패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고 융은 술회하면서 자기의 세계상이 완전히 바뀌어 외부로 3차원 세계의 어둠으로 인도되고 있었다고 했다.
  1896년, 융이 21세 때 그의 아버지가 작고했다. 생계가 어려워지며 대학 조수보 일이나 백부에게 돈을 빌려 공부했다. 융은 대학시절을 아름다운 시절로 회상했다. 많은 책을 읽고 토론하고 친구를 사귀었다. 아버지의 부감목과의 대화를 통해 교부학과 도그마의 역사와 개신교 신학에 관해 많은 걸 배웠다. 그리고 2학기 말 융은 아버지 서재에서 심령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니체의 책을 읽고 자라투스트라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라투스트라를 제2호라고 느꼈다. 그러나 자라투스트라는 병적이라 생각해 오히려 니체를 멀리하게 된다.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 주었듯 자라투스트라는 문을 닫아 버렸다."
  융의 제1호 인격의 행진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무슨 과목을 전공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융은 내과교수 조교로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다 크라프트 에빙의 정신과 교과서를 접하게 됐다. "학문분야의 특이성과 그 형성의 불완정성 때문에 정신과 교과서는 어느 정도 주관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고 한 대목에 이르러 융은 갑자기 흥분감을 느꼈다. 그때 융은 정신의학에 확신을 느꼈고 미래가 약속된 내과를 버리고 누구나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정신과를 택했다.

(5)정신의학에의 길 (27p - 29p)
  1900년, 융이 25세 때 부르크횔츨리라는 이름의 취리히 대학 정신과병원에 주임교수였던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 차석 조수로 들어갔다. 병원은 통상적인 일을 하는 세속의 수도원 같았다. 융은 "인간의 정신이 그 스스로의 파괴에 직면해서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알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정신과 강의가 의도하던 것은 병든 인격을 추상화하고 진단이나 증상기술과 통계로 만족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딱지를 붙이고 진단하고 그렇게 대충 끝나는 것이었다. 정신병에서 심리학이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와 꿈에 대한 기초적인 탐구를 통하여 그에게 개별적인 증례를 이해하고 좀 더 넓게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었다고 융은 회상했다.
  1902년 제1조수가 되어 발표한 논문은 <소위 심령현상의 병리와 심리에 대하여>였다. 이는 전 생애에 걸쳐 추구했던 마음의 심층에 대한 관심의 첫 공식 표현이었다. 이미 학생시절부터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다. 1902년 겨울, 융은 최면술의 심리기제와 아울러 신경증의 심인론에 관한 새로운 학설을 제창한 파리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의 피에르 자네에게 가서 정신병리학 이론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1903년 스위스 북부 샤프하우젠의 한 기업인의 딸인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했다. 그리고 같은 해부터 수년 간 블로일러 교수의 정신적 지원과 프란츠 리클린의 협동하에 단어연상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하여 무의식적인 '콤플렉스'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과 접촉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정신병의 유전적 체질적 요인을 중시하여 이른바 기술정신의학의 기틀을 잡은 독일의 에밀 크레펠린의 견해와 달리 블로일러는 정신병 환자의 체험세계에는 이해 가능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제창해 크레펠린이 생각했던 것처럼 일찍 바보가 되는 조발성 치매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것은 그의 중요 공적 중 하나다. 그는 당시 독일 대학 정신과에서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었던 오스트리아 빈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에 대해서도 편건 없는 관심을 보였던 진취적이고 인간적인 학자였다. 그의 지도하에 부르크횔츨리는 새로운 학풍의 중심지가 됐고 그래서 오스트리아 빈의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학파를 정신분석의 빈학파라고 부르고, 블로일러, 융을 중심으로 한 학파를 취리히학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융에게 대학 정신과는 좁고 융통성 없는 곳이었다. 융은 개업이 확장됨에 따라 대학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해서 상급의사직을 1909년에 그만두었고, 강사직도 1913년에 사직했다. 그러나 부르크횔츨리에서 융은 정신의학사상 기념할 만한 획기적인 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아무도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던 당시 조발성 치매라 부르던 정신분열증 환자를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 어느 정도까지 정신치료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한 것이다. 그는 당시 <조발성 치매의 심리학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6)프로이트와의 만남 (29p- 32p)
  융이 프로이트의 학설을 접한 것은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관한 논문을 블로일러 교수가 주재한 세미나에 소개하면서부터다. 처음엔 그의 글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뒤에 자기가 하던 연상시험 결과가 프로이트 이론과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1906년 프로이트에게 그 연구 논문을 보내며 그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인간심리에 관한 활발한 학문적 토론이 교환되기 시작했다. 1907년 융은 빈에서 프로이트와 처음 대면해 열띤 토론을 했다. 융은 처음부터 프로이트의 학설 특히 성욕중심설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융은 프로이트의 인간심리를 사변적인 이론에 의해서가 아닌 경험론적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의식 너머 마음의 심층을 처음으로 과학의 대상으로 삼아 살펴 가는 것에 매료되었으며, 자기가 프로이트의 성욕설을 이해 못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늘 그에게 말했듯이 경험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상당히 사변적인 독일 대학 정신과 주임교수들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는 가운데서 프로이트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융은 두 독일 교수로부터 경고의 편지를 받았는데, 프로이트를 계속 옹호한다면 대학에서의 장래가 위태로워질 것이란 내용이었다. 융은 진실을 감추고 출세가 보장된다면 출세 같은 건 거들떠 보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끝까지 모든 노이로제가 성적인 억압이나 성적인 외상으로 생긴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융의 성격에 매료되어 그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직을 맡기도 하고 1909년 미국 클라크 대학에 공동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융이 <리비도의 변환과 제상징>이란 책을 내놓고 1912년 뉴욕의 포덤 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나서 둘의 관계는 어긋났다. 그는 이 책에서 정신분열 증상을 가진 환자의 환상세계의 상징적 의미를 수많은 신화와 종교적 표상을 통해서 구명하고 그것이 반드시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성적 내용이 아님을 입증했다. 무의식에는 억압된 성적 욕구나 충동뿐 아니라 종교적 원천과 같은 전혀 다른 창조적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는 모든 인류에게 태초부터 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원상이라 명명했다. 프로이트의 권위의식과 성에 대해  프로이트는 종교에 가까운 집념을 보여 두 사람은 결국 6년 만에 헤어지고 만다. 1913년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직을 사직한다는 서신을 프로이트에게 보냈다. 그리고 연구에만 몰두하기 위해 취리히 대학 강사직을 그만둔다. 융과 프로이트의 사이가 갈라진 이유는 종족이나 문화 차이 때문이 아닌 학문적 진리에 대한 열정과 개성 차이 때문이다.
  프로이트 제자 중 한 사람인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의 성욕설이 스위스인의 도덕 관념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그는 스위스의 정신분석자들은 2, 3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프로이트의 성욕설을 포기했다고 했다.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동료 중 융보다 먼저 그를 떠난 사람 가운데 알프레드 아들러가 있다. 그는 빈 사람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성충동보다 중요한 것으로 보았고, 자기 학설을 개인심리학이라 명명했다. 융은 프로이트와 아들러를 비교하여 양자의 문제점을 제기한 뒤 두 개의 극을 연결하는 선상에 자기의 위치를 설정하려 했다.



  융은 대학시절 역사, 철학, 고고학에 관심있었지만 선택폭이 넓고 자연과학과 관련 있는 의학을 진로로 택한다. 이때 그의 제1호 인격과 제2호 인격은 항상 대항했다. 제1호 인격은 의식적인 자아의 일부였고, 제 2호 인격은 이를 보상하려는 내적 자아(무의식)이었다. 그가 진로를 선택한 건 철저히 제1호 인격 때문이었고, 그는 이를 보고 굴복과 패배속으로 들어간다 표현했다. 1896년 융이 2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금전적으로 힘들게 공부했다. 그리고 이 무렵 개신교에 관해, 니체에 관해, 심령술에 관해 배웠다. 그 뒤 제1호 인격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무슨 과목을 전공할 것이냐는 물음에 부딪혔다. 처음엔 내과로 가려 했지만 크라프트 에빙의 정신과 교과서를 접한 뒤 정신과로 진로를 바꿨다.
  1900년 융은 25세 때 부르크횔츨리라는 이름의 취리히 대학 정신과병원에 주임교수였던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 차석 조수로 들어갔다. 그는 정신병에 관해 더 알고 싶었지만 병원은 통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1902년, 제1조수가 되어 발표한 논문은 <소위 심령현상의 병리와 심리에 대하여>였다. 이는 학생 시절부터 관심가졌던 마음의 심층에 대한 첫 공식적인 표현이었다. 1903년 스위스 북부 샤프하우젠의 한 기업인의 딸인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했다. 단어연상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하여 무의식적인 '콤플렉스'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과 접촉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융의 지도교수였던 블로일러는 정신병 환자의 체험 세계에 관심을 가졌으며, 조발성 치매를 정신분열증이란 이름으로 처음 제창했다. 그는 진취적인 성격 탓에 당시 비난받았던 프로이트의 이론도 편견 없는 관심을 가졌으며 덕분에 부르크횔츨리는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가 됐다. 그래서 빈의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학파를 정신분석의 빈학파라고 부르고, 블로일러, 융을 중심으로 한 학파를 취리히학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융에게 대학 정신과는 좁고 융통성 없는 곳이었기에 상급의사직을 1909년에 그만두었고, 강사직도 1913년에 사직했다. 그러나 융은 조발성 치매라 불리는 정신분열증 환자를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 정신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입증하기도 했다.
융은 블로일러를 통해 프로이트를 접하게 됐고, 자신의 연구 연상시험과 관련있다고 생각해 1906년 프로이트에게 서신으로 접촉했다. 그리고 190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둘은 만나 열띤 토론을 했고, 융은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었다. 융은 독일 교수들처럼 사변적인 이론이 아닌 경험론적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이때도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설 만큼은 인정하지 않았다. 융은 독일 교수로부터 경고를 받기까지 했지만 프로이트를 옹호했다. 이후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직을 맡고 1909년 미국 클라크 대학에서 프로이트와 공동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융이 <리비도의 변환과 제상징>이란 책에서 정신분열 증상을 가진 환자의 환상세계의 상징적 의미를 수많은 신화와 종교적 표상을 통해 규명하고 그것이 반드시 개인적이며 생물학적인 성적 내용이 아님을 입증하며 프로이트와 관계가 틀어졌다. 융은 무의식에 억압된 성적 욕구나 충동뿐 아니라 종교적 원천과 같은 전혀 다른 창조적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를 모든 인류에게 태초부터 내재된 것이라 하며 원상이라 명명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권위의식과 성 이론에 대해 종교에 가까운 집념을 가졌기에 융과 사이가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둘은 학문적 열정과 개성의 차이로 6년 만에 헤어지고 만다. 1913년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직을 사직한다는 서신을 프로이트에게 보냈다. 그리고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취리히 대학 강사직을 그만뒀다.(1913년)
  프로이트 제자 중 융보다 먼저 그를 떠난 사람 가운데 알프레드 아들러가 있다. 그는 빈 사람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성충동보다 중요한 것으로 보았고, 자기 학설을 개인심리학이라 명명했다. 융은 프로이트와 아들러를 비교하여 양자의 문제점을 제기한 뒤 두 개의 극을 연결하는 선상에 자기의 위치를 설정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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