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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 -이부영 독서일지 1

by 보라고둥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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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판 분석심리학 C.G. 융의 인간심성론
제 3판 12쇄 펴낸날 2022년 3월 25일
지은이: 이부영
출판사: (주) 일조각

5p - 24p

제 3판 출간에 부쳐(5p)

이 책은 어디까지나 융의 분석심리학설에 관한 입문서 혹은 개론이다. 분석심리학의 자세한 각론은 1999년 이후 출간된 분석심리학의 탐구 3부작과 그 밖의 단행본들이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을 읽고 충분히 소화할 것을 권한다.


개정증보판을 내면서(7p - 8p)

융의 유, 소년기 체험 등을 자세히 소개한 것은 그의 어릴 때 체험이 어른이 된 뒤의 그의 학설의 씨앗이며 모체였다는 사실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초판 서문(9p -10p)

분석심리학은 무엇보다도 체험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는 심리학설이다. 이론이란 그런 체험을 정리하고 다시 새로운 체험을 시작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융 또한 분석심리학을 알기 쉽게 강의하기는 하였으나, 그때마다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 심리학설을 지식으로만 받아들이지 말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능한 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융의 언어로 심리학설을 소개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이해했고 저자의 경험을 통하여 동화시킨 분석심리학설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분석심리학을 모두 터득했다고 경신하는 사람보다는 회의를 가지고 물음을 던지는 사람을 환영하고 싶다.

1.분석심리학의 역사적 배경과 방법론적 전제(15p - 24p)

1. 카를 구스타프 융의 생애와 사상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견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 카를 구스타프 융.

(1)출생과 가족배경
카를 구스타프 융은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동북부 투르가우 주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961년 6월 6일 퀴스나흐트의 호숫가에서 서거하였다.
융의 집안은 본래 독일의 마인츠 지방 출신인데 융의 할아버지 때부터 스위스에 정착하여 스위스 시민이 되었다.
융의 아버지는 문헌학 전공의 철학박사였는데 학자의 길로 가지 않고 가난한 시골목사가 되어 농부들과 그 아이를 보살핀 사람이다. 융의 어머니는 막내딸이었는데 쾌활하고 소탈한 한편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융의 친할아버지는 외과의사이며 교수, 대학행정가로 진취적이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융의 외할아버지는 프라이스베르크 목사로 개신교복음교회 신학교에서 히브리어와 구약신학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높은 학식과 탁월한 시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자신이 항상 귀신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문을 쓸 때면 귀신이 등 뒤로 다니면서 훼방 놓지 않도록 그의 딸(융의 어머니)을 자기 등 뒤에 앉히게 했다고 한다. 융은 친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를 생전에 만난 일이 없다. 융이 외가의 소질을 이어받아 비합리적인 타계를 생생하게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엘렌버거는 융의 가족배경을 프로이트의 경우와 비교하여 그들의 사상의 특성과 관계짓고자 했다. 오이디푸스 갈등을 제창한 프로이트는 아름다운 어머니의 첫째 아들인 데 반하여 융은 어머니에게 오히려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를 질투하는 소년의 적개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 쪽 조상과 동일시했을 것이므로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노현자의 모습을 인격화하도록 하는 데 그러한 가족관계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가족관계만으로 사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엘렌버거는 융의 인격은 스위스 국민성의 특징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 바젤의 정신, 그의 조상과 그의 가족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던 바젤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융은 역사철학가들을 만났고 어디를 가나 니체 얘기를 들었으며, 그가 분명 유명한 조부 카를 구스타프 융의 손자로서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환경의 산물이라기보다 융 자신의 경험의 산물이었다. 융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치열하게 제기된 물음, 회의와 갈등과 인간의 삶과 신의 문제에 대하여 궁극적인 해답을 요구하는 내적 충동이었으며, 그의 사상은 그 해답의 개현이었다. 외부적 요인은 다만 그의 내면에서 준비된 통찰을 자극하고 표현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고 그의 무의식의 촉각은 또한 그러한 내면의 통찰력을 토대로 필요한 자료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2)유, 소년시절의 내적 체험
  소년기 가장 주목할만한 갈등은 신의 본체에 관한 물음이었다.  개신교 목사관에서 듣고 본 것은 어린 융에게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자함과 죽은 이들을 자기 곁으로 데려가는 무서움이 교차하는 복합된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온갖 수상한 풍문에 휩싸인 까만 모자와 까만 옷을 입은 예수회 회원은 곧 예수님과 동일시되어 예수님에 대한 은연중의 불신을 낳게 했다. 라인 폭포 근처의 라우펜의 목사관에서 살던 시절, 융이 3~4세쯤 됐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최초의 꿈을 경험했다. 어른이 되어서야 이 꿈 속 형상이 수직남근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종교의식적인 남근임을 발견했다. 요도 입구 위에 있는 빛은 팔루스의 어원(빛나는)을 가리킨다고 했다. 융은 이 꿈의 음경은 보통의 신이 아닌 지하의 신으로 받아들였다. 청년시절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강조해서 말할 때면 늘 이 꿈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지하의 대역을 생각했고 그것은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에게 나타난 무시무시한 계시였다고 술회한다.
  융의 유년기에 또 하나의 비밀은 남자 인형과 돌을 가지고 한 놀이에 관한 것이다. 훨씬 뒤에야 융은 그 인형이 고대 그리스의 의신, 아스클레피우스를 수행하며 그에게 책두루마리를 읽어 주는 텔레스포로스와 연관됨을 발견하였고 돌은 원시종족에서 흔히 쓰이는 마력과 생명력을 지닌 돌과 상통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융은 훗날 45세가 되어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무엇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훨씬 뒤에야 비로소 거기에 관해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인간의 마음속에 모든 인류에 보편적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씨앗(조건)이 있고 그것이 상징으로 표현된다는 융의 집단적 무의식과 원형론은 융 자신의 이러한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3)청년기의 고뇌와  극복
11세의 융은 예수님과 긍정적인 관계 형성이 어려워지자 신의 관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융은 길거리에서 어떤 소년의 습격을 받고 쓰러진 뒤 기절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김나지움 기초공부의 암기식, 비창의적인 학습에 흥미를 잃고, 다른 한편 자기 무능에 대한 불안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거대함 앞에서의 자기 존재의 하잘것없음에 대한 불쾌감으로 학교에 가기 싫어졌다. 그의 발작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이차이득을 가진 신경증적 발작으로 융 자신도 당시 그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융은 걱정스런 아버지의 말을 엿듣고 충격에 기절발작을 불사하며 공부를 하려 애를 썼고 여러번의 발작을 감내한 끝에 더 이상 발작은 되풀이 되지 않았다. 융은 이를 통해 무엇이 노이로제인지를 배웠다.
  노이로제는 자기소외의 징조다. 융은 도피를 허용치 않는 자신의 성실함으로 그것을 치유했다. 청소년기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인데 삶과의 직면을 피할 때 그러한 자기소외가 생긴다. 이런 때는 의지로 증상을 극복하고 삶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나', 자아의 주체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융은 자기 마음속에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을 그는 제 1호, 제 2호 인격이라 했다. 제 1호는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여 자기 자신에게조차 확신이 없는 학생'이고 제 2호는 '중요하고 위대한 권위자인 한 남자로서 감히 농담을 허용치 않으며, 제조업자보다도 강하고 영향력 있는 남자로 늙은 남자였다. 정신적 대극의 문제는 융의 분석심리학설에서 일찍부터 다루어지고 있다. 심리학적 유형론이 그것이다. 대극합일의 원초적 능력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80대에 융합의 비의를 쓰기까지 줄곧 그의 학설의 중심을 이룬다. 자아의 탄생과 심리적 대극을 융은 청소년기에 자기 안에 있는 두 가지 성향으로 경험하였던 것이다.
  소아기부터 싹튼 신의 본체에 대한 의문은 청소년기에 더욱 치열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 잡은 문제였다. "세계는 나에게 아름답고 탐스러운 것이기는 했지만 불확실한 위험과 무의미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융은 말한다. 12세의 융은 바젤 뮌스터 광장에서 성당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햇빛을 보고 감동하며 왕좌에 앉아 있을 신을 떠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반대의 불경스런 생각이 떠오르려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 생각을 바꾸려 했다. 이 생각을 막으려 애썼지만 불경스런 생각을 하는 건 그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신의 의지였다. 아버지는 최선의 이유와 가장 깊은 신앙심에서 이 신의 의지에 저항하였다. 아버지는 성서의 계율을 행동규범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직접적인 신을, 성경과 교회 위에 자유롭게 전능한 힘을 가지고 서 있는 신을 알고 있지 않았다. 융은 아버지가 고식적인 신앙의 틀 속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그가 경험했다고 확신했다. 융은 교회의식에는 생명이 없어 보였고, 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아버지의 서재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16세 - 19세 사이 융은 자신에 대한 회의와 불만에서 빠져나왔다. 융은 이것을 제 1호 인격의 강화, 즉 합리적이며 현실적이며 지성적인 측면의 강화로 보았다. 영감의 세계보다 학문을 체계적으로 추적했는데, 철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는 피타고라스, 헤라클리트, 엠페도클레스, 플라톤을 좋아했다. 헤겔은 지루하고 거만했으나 쇼펜하우어에서 큰 소득을 얻었다. "그는 처음으로 세계의 고통을 말한 사람이었다"라고 융은 말한다. 맹목의 의지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지성이 그 상을 내보여야 한다는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문제 해결방법에는 실망했다. "의지가 맹목이면 어떻게 그것이 상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이를 볼 수 있다 해도 어째서 이를 통하여 되돌아서도록 의지를 움직일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 상이란 의지에게 바로 그 의지가 원하는 바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세계상보다도 더 큰 깨우침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책은 분석심리학의 입문서로 융의 어릴 때 체험이 이 학설의 씨앗이자 모체로 작용했다. 분석심리학은 반드시 체험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며, 이 책 하나로 분석심리학을 모두 터득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을 지은이인 이부영의 시선에서 설명해 그의 색채가 묻어날 수 밖에 없다.
  융은 자신의 삶을 무의식의 실현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내면을 보는 힘, 남들이 보지못하는 것들을 보는 힘이 있었는데, 이는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예리한 직관과 외할아버지의 귀신을 보는 능력 등이 그 예다. 융의 사상을 외부적 요인(환경)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존재하지만, 그의 사상은 융 자신의 경험의 산물이었다. 내면의 물음, 인간의 삶과 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내적 충동으로 그의 사상은 그 해답의 개현이었다.
  융은 유, 소년시절 예수에게서 인자함과 무서움 양극단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가 3~4세 때 꾼 최초의 꿈에서 지하의 신의 형상을 발견해 예수님의 지하 대역으로 생각했다. 또한 남자 인형과 돌을 가지고 한 놀이를 통해 어린 아이의 꿈에 이토록 어른스런 생각을 담은 꿈 내용에 감탄하며, 인간의 마음속에 모든 인류에 보편적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씨앗이 상징으로 표현된다는 집단적 무의식과 원형론에 영향을 끼쳤을 확률이 높다.
  11세의 융은 예수와의 긍정적 관계 형성이 어려워지자 신의 관념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어떤 소년의 습격을 받은 뒤 기절발작을 가진적이 있었는데, 이는 자신이 김나지움에 가기 싫은 마음과 이어졌다. 학교의 암기식, 비창의적인 학습에 대한 흥미 감소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거대함 앞에 자기 무능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그 조차도 자기 자신이 도피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절발작을 불사하며 공하려 애를 써 의지와 성실함으로 이를 극복했다. 융은 이를 통해 노이로제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노이로제는 자기소외의 징조다. 청소년기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인데 삶과의 직면을 피할 때 그런 자기소외가 생긴다. 이런 때 의지로 증상을 극복하고 삶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나', 자아의 주체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융은 자기 마음속에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을 제1호, 제2호 인격이라 했다. 제1호는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여 자기 자신에게조차 확신이 없는 학생'이고, 제 2호는 '엄격하고 위대한 권위자인 늙은 남자'였다. 이는 그의 학설 내의 정신적 대극의 문제와 이어졌다. 융은 자아의 탄생과 심리적 대극을 청소년기에 자기 안에 있는 두 가지 성향으로 경험하였던 것이다.
  소아기부터 싹튼 신의 본체에 관한 의문은 청소년기에 더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2세의 융은 바젤 뮌스터 광장에서 성당을 바라보며 왕좌에 있을 신과 함께 불경스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를 떠올리게 하는 건 신의 의지였음을 깨달았고 목사였던 아버지가 계율로써 깨닫지 못한 것을 스스로가 느꼈다고 믿었다.
  16세-19세의 융은 자기 회의와 불만에서 빠져나왔다. 융은 이것을 제 1호 인격의 강화, 즉 합리적이며 현실적이며 지성적인 측면의 강화로 보았다. 그는 철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쇼펜하우어에서 큰 소득을 얻었으나 맹목의 의지를 반전시키기 위해 오직 지성이 그 상을 내보여야 한다는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문제 해결방법에 실망했다. 그는 쇼펜하우어보다 도리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큰 깨우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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