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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역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1 (2) 초기 체사피크 식민지

by 어린 아이 2022.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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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이식과 경계 지역

68p - 83p

0. 영국 식민지 사업 배경
영국의 영구 정착지 건설 노력이 있었다. 로어노크 섬의 식민지 실패로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신세계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강했고 정부 지원 없이 사적이고 빈약한 잦은 모험이 있었다.

1.초기 체사피크 식민지: 제임스 타운 (1차) - 버지니아
1606년, 제임스 1세 특허장을 하사받은 런던 회사는 버지니아로 탐험대를 출범시켰다. 그들은 체사피크 만을 항해해 제임스타운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안전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 지역은 낮고 습한데다 숲이 우거졌고, 막강한 인디언 부족과 맞닿아 있어 결과적으로 험난한 지역이었다.(추후 원주민들에게 감금당하고 생존을 위해 시체까지 먹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에는 그들의 생존에 의의를 둘 만큼 식민 계획은 실패했다. 전염병(말라리아 등) 문제나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이주민, 식량 생산(농사)보다 수출(금, 목재, 타르, 송진, 철)에 집중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후 1608년, 추가 보급품과 인원을 데리고 온 세계 여행가 "존 스미스" 선장의 노력으로 분열되어 있던 식민지 질서를 바로 잡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더불어 주변 원주민을 납치하거나 식량을 훔치며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2.초기 체사피크 식민지: 제임스 타운 (2차) - 버지니아
런던 회사(버지니아 회사로 명칭 변경)는 1609년 왕으로부터 새로운 특허장을 하사 받아 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들라와 경"을 식민지의 첫 번째 총독으로 파견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생존자들을 제임스 강에서 만나 그들을 회유해 다시금 제임스타운을 일구기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들라와 경의 지휘 아래 식민지의 존속 뿐만 아니라 확장까지 꿰할 수 있었다. 그가 강조한 질서와 규율과 인디언 부족 습격 횟수의 증가와 함께 궁극적으로 담배의 발견이 중요했다. 이미 유럽 내에서는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서 쿠바 원주민들이 타바코라고 하는 작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 가지고 돌아온 이후, 17세기 초에는 수많은 유럽인들이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들여온 담배를 피웠다. 1612년 제임스타운의 농장주 존 롤프가 버지니아에서 담배 재배를 시작했다. 담배 재배자들에겐 2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더욱 넓은 경작지와 더 많은 노동력.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국 농부들은 내륙 쪽으로 들어가 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한 사람당 50에이커의 땅을 할당받는 인두권 제도가 생겨났다. 인원수가 많을수록 할당받는 땅 또한 증가하므로 가족 단위 이주가 증가했다.
이후 버지니아 회사는 경제를 다각화하기 위해 제철 직공을 비롯한 숙련 장인들을 보냈고, 영국 여성을 보내 결혼을 장려해 정착률을 높였다. 또한,  자치 정부를 만들어 정치적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619년 7월 30일, 미래에 미국이 될 지역의 치초의 의회인 버지니아 하원이 구성됐다. 그리고 8월 말 경, 아프리카에서부터 20명 남짓한 흑인을 데려오면서 흑인 노예의 시작이 되었다. 그 전까진 일정 기간 일한 후 풀려나는 계약 하인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흑인과 인디언들을 복종시켜 사회를 차츰 건설해 나갔다.

*1610년, 들라와 경의 후임인 토머스 데일 경은 포우하탄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를 납치했다. 그동안 포카혼타스는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 중재 역할을 해왔는데, 납치된 이후 유럽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고 결혼하여 1614년 영국을 방문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들에게 인디언 문명화 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1624년 버지니아 회사가 파산하고 제임스 1세는 회사에 하사한 특허장을 철회했다. 이후 1776년까지 식민지는 왕령 식민지로 유지되었다. 비록 회사는 망했지만 식민지는 유지되었고, 정착을 시도한 많은 사람들이 죽는 (8,500명 중 약 80%) 불행을 겪었다.

3.농업 기술 교류 - 제임스타운 버지니아
초기 영국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문명에 대한 우월감으로 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로부터 농업 기술(특히 옥수수의 가치, 옥수수와 콩을 같이 심으면 땅이 비옥해진다는 정보 등)과 카누와 같이 현지에 특화된 기술을 배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미스는 종종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부자가 된 이유가 그 쪽 원주민들이 선진 문명을 건설하고 많은 금과 은을 채굴했다고 믿으며, 원주민을 비교하며 자신이 정착한 땅의 원주민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했다.

4.메릴랜드와 캘버트 가문
메릴랜드 식민지는 캘버트 가문이 식민지를 건설했다. (최초 정착: 볼티모어 경 1세 조지 캘버트) 대규모 부동산 투기와 영국 가톨릭 교도의 피난처 제공이 목적이었다. 그들은 높고 건조한 절벽 위에 세인트메리즈 마을을 건설했다. 주변 인디언들은 우호적이었고, 옥수수와 임시 숙소도 제공해주었다. 캘버트 가문은 식민 사업에 드는 돈을 충당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정착민들을 끌어들였고, 그 결과 동료 가톨릭 교도인보다 프로테스탄 교도의 인원수가 훨씬 많아졌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관한 법령을 공표해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잦은 긴장과 폭력이 있었다.
캘버트 가문은 그들의 친척과 영국인 귀족에게 넓은 땅을 하사해 상류 계급을 형성했다. 그리고 메릴랜드도 담배 생산 중심지가 되었는데, 부족한 노동력은 인두권 제도의 도입을 일으켰고, 초기 계약 하인에서 결국 아프리카 수입 노예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5.버지니아 - 베이컨의 반란
버지니아 식민지는 1642년부터 윌리엄 버클리 경이 총독으로 약 30년간 통치했다. 그는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블루리지 산맥 동쪽 지역을 얻었고, 원주민들은 백인 정착을 금하기 위해 서쪽 경계선을 설정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버클리 경은 버지니아 하원 투표권을 백인 남성에서 대토지 소유자들로 제한하면서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오지(backcountry)로 알려진 서부 지역에 새로 정착한 사람들은 동부 귀족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그 결과 1676년 너대니얼 베이컨을 주축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총독이 부여하는 상원 의석을 소유한 서부 지역 대지주였다. 그런데, 그는 인디언들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서쪽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과 인디언과의 모피 교역을 버클리가 장악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속한 인구 증가와 영토 확장의 열망으로 서부 변경에서 백인과 원주민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고, 버클리는 그들에게 비협조했다. 심지어 그는 베이컨과 그 부하를 반란자로 규정했다. 결국 베이컨은 회군해 제임스타운을 치고 총독을 쫓아냈다. 그의 반란은 "인디언과 백인 사이에 영역 다툼" 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자유인 간의 갈등"을 시사했다. 그리고 이 불안과 긴장을 해소하고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엘리트 집단은 노예무역으로 눈을 돌렸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자유인처럼 놓아줄 필요도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협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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