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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역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1 미국의 탄생(1)

by 어린 아이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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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p - 65p
1장 문화의 만남

1.
다루는 연대: B.C 16,000 ~ A.D 1609 / 문명 진보와 재앙
첫 장답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의 내용부터 담고 있다. 학자들마다 추정하고 있는 인구수는  백만 명에서 1억만 명까지 다양하다.
어찌됐건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하기 전부터 많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서유럽 국가들이 서유럽에 정착하면서 원주민과 교류를 했다.
유럽인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목재, 금과 은, 옥수수, 농업 기술을 얻어갔으며, 원주민은 설탕과 바나나, 가축(돼지, 소, 양 특히 말)을 얻었다.
이런 점을 봤을 땐 유럽인의 탐험이 원주민들에게 문명 진보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들에게 재앙인 요소도 분명 컸다.
유럽인들은 천연두를 비롯한 인플루엔자 등과 같은 각종 질병을 옮겼으며, 유럽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노예 제도를 가속화시키면서 가혹하게 운영했다.
그 결과 완전히 전멸한 종족, 95%가 죽은 원주민 종족들도 많았다.

2.
콜롬버스 탐험 전 대표적인 남아메리카 현지 문명은 페루의 잉카 문명, 멕시코의 마야, 아즈텍 문명이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 아즈텍은 마야를 계승했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등 야만적 종교가 특징이었다.
마야인은 쿠스코, 잉카인은 마추픽추가 대표적이다.

3.
콜롬버스 탐험 전 북아메리카 문명은 북극권의 에스키모, 북부 산림 지역의 수렵꾼, 해안의 북서부 태평양 부족, 건조한 극서부 부족등 다양하다.
남아메리카 만큼 정교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문명을 발달시켰다.
땅이 넓고 지역마다 기후가 달라 다양한 생활 양식이 특징.
종교는 자연 숭배

4.
신세계 동경: 상업과 국가주의 - 부자
신세계를 동경한 원인은 첫 번째 15세기 유럽의 인구 증가로 인한 수요 폭발로 상인 계층의 출현이었고, 두 번재는 군주 중심의 강력한 새 통치 체제의 등장이다.
서유럽인들은 교역을 통해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 결과 항해술이 발달.

5.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메리카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인류 전체에서든 유럽 전체에서든)
다만 콜럼버스는 원주민(유럽 - 아메리카)들과 교역의 물꼬를 텄다.
그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으로 포르투갈에서 선원 생활을 했으나 포르투갈 지도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스페인에게 지원을 받아 모험을 떠났다.
당초 그의 목표는 지구를 조금 더 작게 생각했고, 아프리카를 경유해 아시아로 가던 원래 경로 대신 대서양을 넘어 훨씬 더 가까운 아시아행 경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있었고 이를 몰랐던 그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보고 인도인을 뜻하는 인디안으로 불렀다.

그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훌륭한 업적을 세웠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은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따 만들어졌다.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생생히 기술해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6.
서유럽 중 스페인이 선두로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다.
그들은 아메리카가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문 또한 들었다.
아즈텍 제국의 강력한 황제 몬테수마와 싸워야 했으나 천연두로 가볍게 승리를 거두고, 세인트오거스틴, 산타페와 같은 전초기지를 건설했다.
원주민 말살정책 등 갈등도 많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차별적이긴 하나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원주민들과 결혼도 했다.

7.
17세기 초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유럽 국가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이었다.
스페인은 강력한 해상 능력으로 초기에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으며, 프랑스는 후발주자였지만 원주민과 결혼을 하는 등 협력적인 자세로 원주민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반대로 영국은 원주민들과 거리를 두려 했는데 이 결과 초기 식민지 건설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백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원주민들인이 미개인, 야만인으로 인식됐다.
그들이 각종 질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 또한 종교적으로 신의 의지를 뜻했으며 이는 그들의 지배 명분이 되었다.

8.
노예 제도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인들도 미개했다.
아프리카는 실상 문명화된 집단이었으나 유럽인들의 사탕수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아프리카 노예들을 아메리카로 이주시켜 강제노동을 시켰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모계제라는 공통 특성을 가진다. 남자는 사냥과 가축 관리, 여성은 농사와 교역등에 힘을 발휘했다.
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이 아니더라도 원래부터 노예제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 방식은 많이 달랐다.
아프리카 자체 노예 제도에서는 일정기간 자유를 상실 할 뿐 원래 지위를 되찾았으며 법적인 보호를 받아 결혼도 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노예 신분이 되물림되지 않았다.

9.
대서양 세계는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가 맞물려 있다.
이민 이유에는 경제적인 이유와 종교 박해 등이 있었으며,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 사상 또한 원주민들의 정치 개념에 영향을 끼쳤다.

10.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오게된 원인은 유럽 전쟁, 종교 분쟁, 농지 감소 등이 있다.
크게 경제, 종교 원인이 있는데, 이 당시 영국에서는 중상 주의가 유행했다. 부유해지기 위해선 다른 나라 혹은 다른 개인에게 수출을 많이하고 수입은 적게 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영국의 의류, 양모 판매는 이미 유럽 내에서 공급 포화 상태였고, 이때 아메리카는 주요 원료 공급처(목재, 금, 은, 해군 군수품 등)이자 시장 역할을 할 기회의 땅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 정책에 눈길을 돌렸다.

종교적인 측면으로는 이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 개혁이 유행이었는데
영국 내에서는 헨리 8세가 창시한 영국 국교회와 정화를 추구하는 청교도(극단적 청교도인 분리주의자 포함)가 갈등을 일으켰다.
청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처음 아일랜드로 이주했다가 아메리카로 눈길을 돌렸으며 주요 전제는 원주민들과 섞이지 않는 것이었다.

+영국 내 종교개혁은 왕과 교황 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분쟁의 결과였다.
헨리 8세는 이혼을 하길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헨리 8세가 자체적인 국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국교회는 교황에서 왕으로 권위가 옮겨졌던 것일 뿐이기 때문에(제도 중심) 복음 중심인 청교도인들이 반발 했다.
제임스 1세 때 탄압이 거세져 청교도들이 이주를 시도했다.

11.
-서유럽 주요 정착지
영국 - 제임스타운, 플리머스 -> 런던 상인에게 남부 식민 사업, 플리머스 상인들에게 북부 식민 사업 전권에 관한 특허장 발부.
스페인 - 산타페, 세인트 오거스틴
프랑스 - 퀘백
네덜란드 - 뉴네덜란드, 뉴암스테르담(맨해튼 섬), 뉴욕 근처.

->17세기 초 전까지 뉴멕시코 지역(북아메리카 아래 부분)과 남아메리카 (잉카, 아즈텍 제국 근처)등이 주요 식민지였고,(스페인, 포르투갈)
17세기 초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미국 땅인 북아메리카 지역에 유럽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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